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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명재를 만나다 - 조선시대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과 그를 기리기 위한 재실 모명재, 한국의 역사가 된 400년전 역사 속 두사충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모명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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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

  • 지정번호 :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호
  • 소재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팔현길 248 영남제일관 앞
  • 시대 : 조선

영영축성비는 1737년(영조 13)에 대구 읍성을 완공한 뒤 공사규모와 과정을 기록하여 세운 것입니다. 선조 23년에 토성으로 쌓았지만 임진왜란 때 무너진 이후 영조 12년 대구에 부임한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민응수의 건의를 조정에서 받아들여 축성되었습니다. 대구 읍성은 1736년 공사를 시작해 동원된 인원만 해도 78,584명이었고 완공된 성의 둘레는 총 2,124보(2,650m), 성 위에서 몸을 낮추고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는 방어시설인 여첩(女堞)이 819개, 성의 높이는 서남쪽이 18척(5.5m)이며 남북이 17척(5.1m), 뒤축대의 넓이가 7보, 높이가 3급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문은 민응수가 짓고 글씨는 백상휘가 썼습니다.

대구부수성비(大邱府修城碑)

  • 지정번호 :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5호
  • 소재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팔현길 248 영남제일관 앞
  • 시대 : 조선

대구부수성비는 1869년(고종 6)에 세운 비로,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김세호가 1870년(고종 7) 봄에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작업을 시작한 뒤 그해 11월에 마쳤는데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입니다. 원래보다 높이와 크기를 키워서 동서남북의 성벽 위에 4개의 누각을 세웠는데, 누각의 이름은 동을 정해루 (定海樓), 서를 주승루(鑄勝樓), 남을 선은루(宣恩樓), 북을 망경루(望京樓)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문은 김세호가 지었고 글씨는 당시 공사 책임관이었던 최석로가 썼습니다. 1906년(광무 10)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갈 곳을 잃었다가 1932년 대구 향교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0년 영남제일관을 세우면서 현재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 담당부서문화체육과
  • 담당자정재옥
  • 연락처053-666-2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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