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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명재를 만나다 - 조선시대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과 그를 기리기 위한 재실 모명재, 한국의 역사가 된 400년전 역사 속 두사충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모명재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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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봉 전설 속에서 일상을 사는 지혜를 배우다

모명재길 1코스는 형봉과 제봉을 잇는 길입니다. 힘이 센 두 남매가 아웅다웅 힘겨루기 내기를 통해 형봉과 제봉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또한 명나라 최고 풍수지리가였던 두사충이 꼽은 명당이 바로 형제봉으로 맑은 자연의 기운을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거리 3.39km / 소요시간 120분

  1. 1. 모명재
  2. 2. 형봉건강쉼터
  3. 3. 그루터기쉼터
  4. 4. 제봉
  5. 5.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
  6. 6. 영남제일관

형제봉

모봉에서 바라본 형봉과 제봉
형제봉

지명(地名)에는 그 지역만의 역사와 이야기가 담기기 마련인데요, 우리지역 형제봉에도 이와 같은 이야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실제로 형제봉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형봉은 192m, 제봉은 170m, 모봉은 149m로 가장 낮습니다. 비록 아웅다웅 다투며 큰 산을 만들어 냈지만 결국엔 서로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형국이 형제끼리 오손도손 정답게 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또한 형봉과 제봉을 한 눈에 품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모봉입니다.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에 가장 낮은 곳에서 형제를 품고자 했던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묻어나는 곳이지요. 힘이 센 남매가 만든 산답게 형제봉에는 심신을 단련할 수 있는 ‘건강 쉼터’가 있고, 명나라 최고 풍수지리가 ‘두사충’이 꼽은 명당이자 그가 ‘모국(母國)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영면한 곳도 또한 형제봉입니다.

대구 읍성의 관문, 영남제일관

화려한 미래 도시 대구. 그러면서도 깊이 있는 역사를 간직한 도시가 대구입니다. 이러한 역사 도시의 모습을 대변하듯 대구에도 읍성(邑城)이 있었는데요, 대구 중심지를 감싸 안은 대구 읍성은 조선시대 1590년(선조 23)에 대구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로 취임한 윤현(尹晛)이 축성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토성(土城)을 만들었으나 임진왜란 때 허물어지고 1736년(영조 12)에 다시 석성(石城)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대구 읍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성문과 2개의 암문(暗門, 야간통행문)이 있었는데,동문을 진동문(鎭東門), 서문은 달서문(達西門), 남문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북문을 공북문(拱北門)이라 하였으며 현재 읍성과 성문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영남제일관은 4성문 중 가장 규모가 큰 성문으로 신임 관찰사가 부임할 때에 가까운 서문을 두고도 성곽을 돌아서 당당하게 입성하던 곳입니다. 영남제일관이 원래 위치한 곳은 중구 남성로 약전골목과 종로가 만나는 지점이었으나 읍성이 철거될 때 함께 철거되었고 1980년에 현재 망우당공원에 새로이 세운 것으로 원래의 것보다 더 크게 지어졌습니다.
비록 옛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지만 영남제일관에서 허망하게 허물어진 역사를 기억하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대구 읍성의 관문’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관문’으로, 영남제일관은 대구의 새로운 역사가 되어 그 깊이를 한층 더해줄 것입니다.

영영축성비

영영축성비는 1737년(영조 13)에 대구 읍성을 완공한 뒤 공사규모와 과정을 기록하여 세운 것입니다. 선조 23년에 토성으로 쌓았지만 임진왜란 때 무너진 이후 영조 12년 대구에 부임한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민응수의 건의를 조정에서 받아들여 축성되었습니다. 대구 읍성은 1736년 공사를 시작해 동원된 인원만 해도 78,584명이었고 완공된 성의 둘레는 총 2,124보(2,650m), 성 위에서 몸을 낮추고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는 방어시설인 여첩(女堞)이 819개, 성의 높이는 서남쪽이 18척(5.5m)이며 남북이 17척(5.1m), 뒤축대의 넓이가 7보, 높이가 3급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문은 민응수가 짓고 글씨는 백상휘가 썼습니다.

대구부수성비

대구부수성비는 1869년(고종 6)에 세운 비로,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김세호가 1870년(고종 7) 봄에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작업을 시작한 뒤 그해 11월에 마쳤는데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입니다. 원래보다 높이와 크기를 키워서 동서남북의 성벽 위에 4개의 누각을 세웠는데, 누각의 이름은 동을 정해루 (定海樓), 서를 주승루(鑄勝樓), 남을 선은루(宣恩樓), 북을 망경루(望京樓)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문은 김세호가 지었고 글씨는 당시 공사 책임관이었던 최석로가 썼습니다. 1906년(광무 10) 대구 읍성이 헐리면서 갈 곳을 잃었다가 1932년 대구 향교로 옮겨 보존되다가 1980년 영남제일관을 세우면서 현재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봉 철책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길,
이 철책은 경계가 아닌
안전을 위한 조형물입니다.

형제봉길은 2군사령부 경계와 맞닿아 있는 길로 군인들이 지켜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도보길입니다. 길을 따라 난 철책은 두 공간의 경계가 아닌, 우리를 지켜주는 울타리 같은 조형물이며, 단절이 아닌 소통의 조형물입니다. 수성구민, 대구시민 그리고 우리나라를 지키고 있는 국군장병들께 고마움을 느끼며 이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보세요.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의 고향이 정말
대구시 수성구 고모령인가요?
[비 내리는 고모령]은 1948년 현인이 부른 노래로 현인과 함께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 낸 작사가 유호와 작곡가 박시춘의 작품입니다. 현인의 음반 작업을 맡은 유호는 가사 독촉에 시달리고 있던 중 우연히 지도책을 꺼내 보다가 대구에 있는 고모(顧母)라는 지명을 발견하고 어머니와 이별하는 아들을 소재로 <비 내리는 고모령>이란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이 노래는 가수 현인 특유의 창법으로 대중들의 가슴을 저미면서 대히트를 치게 되었지요. 노래가 만들어진지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1991년 10월 17일, 수성구의회 개원기념으로 고모령 노래비가 망우당공원에 세워졌으며 고모령 전설과 함께 [비 내리는 고모령]노래의 본 고장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 담당부서문화체육과
  • 담당자정재옥
  • 연락처053-666-2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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