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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명재를 만나다 - 조선시대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과 그를 기리기 위한 재실 모명재, 한국의 역사가 된 400년전 역사 속 두사충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모명재를 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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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명재에 얽힌 임진왜란 당시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그 자체로 더없이 좋은 역사교육이 될 것 같네요.

조선시대에 대구에서 살았던 외국인

조선시대에도 외국에서 귀화했던 외국인이 있었을까요?
그 답은 ‘네’입니다. 대구에도 두명이나 있었죠. 한 명은 일본 사람이고 한 명은 명나라 사람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이렇게 외국인이 그것도 대구에서 거주했다는 사실은 무척 생소하게 다가오는데요.

두 사람 다 임진왜란때 조선으로 들어와 이후 대구에 정착한 사람으로 한명은 모명재의 주인공인 명나라출신의 참모였던 '두사충'이고 다른 한명은 일본 출신으로 왜란 초기에 조선으로 귀화한 '김충선'입니다. (김충선에 대한 이야기는 ‘녹동서원’을 찾아보시면 쉽게 찾으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출처 : 대구관광공식블로그 http://blog.naver.com/daeguvisit

두사충은 임진왜란 때 우라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사람인데요. 그 두사충을 기리는 모명재의 이야기 또한 임진왜란부터 시작합니다.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2번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입니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10년 전에는 이이의 ‘10만양병설’이 있었고, 임진왜란 2년전에는 조선통신사의 파견으로 일본에 대한 조사를 해왔으나 돌아온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대해 서로 상반된 의견을 내놓아 그에 대한 방비는 흐지부지하게 됩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는 장면을 그린 병풍입니다.

이미지출처 : 이순신 홈페이지 http://www.yi-sunsin.com

1592년 4월 처음 일본이 침략했을 당시 약 2개월만에 전 국토가 함락을 당하게 되는데, 그 피해가 엄청났답니다. 하지만 그 때 이순신장군이 나타나 반격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해전의 승리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임진왜란이 발생한 그해 겨울 그러니까 1592년 12월에 명나라가 원군으로 참여하면서 전세를 서서히 뒤집기 시작합니다.

이 때 두사충이 명나라 제독이던 이여송과 함께 조선에 원병으로 왔으며, 그는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 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죠.
(두사충은 풍수지리의 대가로도 유명한데 이러한 경력이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593년 4월 일본군은 퇴각하게 되고 휴전협상을 가지는데요. 하지만 일본은 5년 후 1597년 1월 휴전협상을 깨고 다시 조선을 침략하는데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합니다.

이 정유재란에서 두사충은 그의 매부인 진린도독과 함께 사위 나학천과 두 아들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오게 되고 전쟁을 마친 후 조선으로 귀화를 하게 됩니다.

정유재란도 조선의 육군과 수군은 왜군을 모두 물리치고 전쟁을 끝내게 됩니다. 이순신장군이 사망한 최후의 해전이었던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임진왜란이 모두 끝나게 되죠.

7년에 걸친 두 차례의 왜란으로 온 나라는 폐허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잡혀갔습니다. 또 정부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백성에게 곡물을 받고 벼슬을 팔아 신분을 높여 주어 신분 제도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문화재의 손실도 컸고 조선의 도공과 성리학자들이 일본에 납치되어 갔는데, 이들은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아픈 상처였던 임진왜란 당시, 참전을 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인물이 두사충이며, 전쟁이 끝난 후에 조선에 남아 대구에 거처를 두고 풍수지리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 표준 영정. 1952년 장우성 그림. 아산 현충사 본전.

이순신장군

이순신 장군은 1545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좋아했던 그는 28세 에 무과(武科)에 응시했지만, 우리가 잘 아는 말이 거꾸로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나 낙방을 하게 되죠. 하지만 4년 뒤 무과에 합격한 후 여러 변경 지역의 장수와 정읍 현감을 거쳐 그 원칙을 지키는 강직함이 알려지고 서애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었죠.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2개월만에 멸망직전에 몰렸던 조선을 이순신장군은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20여차례의 해전을 모두 승리함으로서 나라를 구하는 영웅이 됩니다.

이순신장군이 치른 중요한 해전은 한산도대첩, 명량대첩과 이순신장군이 사망하게 된 노량해전을 꼽을 수 있답니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이 끝나는 1598년 11월 발발했는데요, 이순신 장군은 퇴각하는 왜군을 격파하기 위해 일본군 전함 300척과 노량에서 최후의 해전을 벌이게 되고 이때 안타깝게도 이순신장군은 이 전쟁에서 일본군의 조총에 맞아 사망을 합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순신장군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지요.

그 뒤 구국의 영웅인 이순신장군을 국가에서 받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는 임진왜란이 끝난 7년 후 1604년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약 190여년이 지난 1793년에는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중심인 세종로 광화문에 동상이 세워지고 현충사가 대대적으로 정비됨으로써 그는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답니다.

이순신과 두사충

두사충이 맡은 일은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명의 원군이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했죠.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수군을 통괄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아주 친했습니다. 게다가 두사충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왔다가 1597년 정유재란때 다시 조선을 오게되었는데요.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우리나라 장수도 아닌 외국사람이 수만리 길을 멀다 않고 두번씩이나 나와 도와주자 감격하여 두사충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모명재의 기둥에 붙은 주련이 그 시입니다.

대구, 풍수지리와 두사충

두사충은 조선 팔도를 유람하며 풍수이론을 갈고 다듬어 두사충결(杜師忠訣)이란 풍수서를 펴내었습니다. 지금도 그 두사충결은 풍수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봐야하는 책이라고 합니다.
그런 두사충이 자리잡은 곳이 바로 대구였는데요. 그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에 귀화하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그가 원하는 곳에 살게 해주겠다고 하자 현 경상감영공원 자리를 선택하였습니다. 경상감영공원 자리는 그 후 대구의 중심이 되었는데 두사충의 말대로 길지가 아니었을까요.

2년정도 그 땅에서 살았던 두사충은 1601년 당시 상주에 있던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기게 되어 그 땅을 경상감영 터로 흔쾌히 내어놓습니다.

[규장각소장 대구지도]
규장각 소장
嶺南邑誌(1871년, 奎 12173)에 수록된 경상도 대구부 지도.

[경상감영지도]
1903년 대구시가(大邱市街) 지도 읍성의 가운데에 위치한 건물들은 옛 경상감영(지금의 중앙공원 자리)입니다.

두사충은 이후 계산동으로 옮겨 이사를 하게 되는데요. 이곳에서 열악한 의복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인근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아직도 이곳을 뽕나무 골목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나이가 든 이후에는 현재의 대덕산 근처로 이사를 했는데, 무척이나 고향을 그리워 하였다고 합니다. 그 인근지역을 명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대명동이라 이름을 붙였답니다. 지금 대명 11동까지 있는 대명동은 대구에서 가장 면적이 큰 동이 되었죠.

두사충은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자신의 묘터로 쓸 명당으로 형제봉을 지목하였으나 그 자리로 가던 도중 사망하여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이 잡아둔 명당을 정확히 찾지 못하고 묘소를 형제봉 기슭에 쓰게 되었고 현재 모명재의 위치가 되었다고 합니다. 속설에는 담티고개라는 명칭도 두사충이 명당을 찾으러 다니던 중 이곳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명당을 찾기도 전에 담이 채여 사망한 곳이라 해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모명재에 얽힌 여러 설화와 역사이야기를 함께 들려주신다면 역사를 재미있게 접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 담당부서문화체육과
  • 담당자정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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