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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충(杜思忠)

두사충은 중국 두릉(杜陵)사람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우리나라를 원조하기 위해 왔던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이다.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는,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로 이여송과 함께 일급참모로서 항상 군진을 펴는데 조언해야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수군을 통괄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아주 친했다. 임란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陳璘) 도독과 함께 조선에 온 후 정유재란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압록강까지 매부 진린을 배웅한 후 자기는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두사충에게 대구 시내 중앙공원 일대를 주고 거기서 살도록 하였고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두사충은 그 땅을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는 두씨 문중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두씨 일가는 계산동으로 옮기자마자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한다. 그러나 두사충은 고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그는 최정산(最頂山=현재의 대덕산)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 쪽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이후 나이가 많아지자 젊었을 때 묘터로 봐 두었던 고산(孤山)으로 향했으나 워낙 쇠약한 몸이라 도저히 고산까지 가지 못하고 담티재로 돌아오는 길에 두사충은 아들에게 오른쪽의 형제봉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예언했다. 따라서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묘소를 형제봉 기슭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으로 두사충을 제향하는 모명재(慕明齋)를 세웠으며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525길 14-21 (만촌동)에 위치하고 있다.
두사충(杜思忠)의 묘
전설적인 명나라 명풍수
조선에 처음 들어온 두사충은 한반도의 지세와 산세를 보고 큰 인물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 예견하고 그렇게 되면 명나라가 곤경에 처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 이여송에게 보고하자 이여송은 두사충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선의 혈맥을 끊어놓으라고 지시했다. 이에 두사충은 진을 치는 자리를 잡는데 소홀히 하고 조선의 혈맥을 끊는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평양성 싸움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던 명군은 벽제관 싸움에서 왜군에 대파 당하였다. 벽제관 싸움의 패인이 진터를 잘못 잡았다는 이유로 두사충은 참수를 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조선의 우의정 정탁과 이시발 등의 구명운동으로 간신히 죄를 면탈하게 되었다. 정탁의 시은에 대한 보은으로 두사충은 정탁의 양택과 음택을 잡아 주기도 했다.
그 일로 두사충에게 커다란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 그 사건 이후 두사충은 더 이상 조선의 혈맥을 끊는 일에 앞장서지 않고 혈맥을 피해 말뚝을 박는 등 조선에 매우 우호적인 인사가 되었다. 두사충은 풍수전문가로서 육지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진을 칠 줄 알았고 명에서 같이 온 진린 제독이 그의 매부라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과도 자주 만나 함께 진법과 전술 전략을 논의하였고 서로를 존경하고 아끼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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