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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제일관

영남제일관 이미지



화려한 미래 도시 대구. 그러면서도 깊이 있는 역사를 간직한 도시가 대구입니다. 이러한 역사 도시의 모습을 대변하듯 대구에도 읍성(邑城)이 있었는데요, 대구 중심지를 감싸 안은 대구 읍성은 조선시대 1590년(선조 23)에 대구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로 취임한 윤현(尹晛)이 축성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토성(土城)을 만들었으나 임진왜란 때 허물어지고 1736년(영조 12)에 다시 석성(石城)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대구 읍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성문과 2개의 암문(暗門, 야간통행문)이 있었는데,
동문을 진동문(鎭東門), 서문은 달서문(達西門), 남문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북문을 공북문(拱北門)이라 하였으며 현재 읍성과 성문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1888년에 대구를 다녀간 프랑스 여행가 ‘샤를 바라(Charles Varat,1842~1893)’는 <조선기행(조선종단기)>에서 대구 읍성이 “북경(베이징)성의 축소판과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표현한 바, 도시 위용에 걸맞는 성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입니다. 4개의 성문을 중심으로 큰 길이 나고, 또 그 길 안쪽으로 가늘고 촘촘한 골목길이 생겨났으며 이는 대구 도심의 역사가 되었지요.

이처럼 대구의 역사가 담긴 그릇과 같은 대구 읍성은 일제에 의해 허망하게 깨지고 맙니다. 1906년 일본 상인들이 대구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철거를 주장하자 당시 관찰사 서리로 있던 박중양이 철거에 대한 황제의 윤허도 받지 않은 채 제 멋대로 성을 허물어버렸어요. 일제는 그 자리에 도로를 내어 지금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등 지금의 4성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영남제일관은 4성문 중 가장 규모가 큰 성문으로 신임 관찰사가 부임할 때에 가까운 서문을 두고도 성곽을 돌아서 당당하게 입성하던 곳입니다. 영남제일관이 원래 위치한 곳은 중구 남성로 약전골목과 종로가 만나는 지점이었으나 읍성이 철거될 때 함께 철거되었고 1980년에 현재 망우당공원에 새로이 세운 것으로 원래의 것보다 더 크게 지어졌습니다.

비록 옛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지만 영남제일관에서 허망하게 허물어진 역사를 기억하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대구 읍성의 관문’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관문’으로, 영남제일관은 대구의 새로운 역사가되어 그 깊이를 한층 더해줄 것입니다.
  • 담당부서관광과
  • 담당자박현정
  • 연락처053-666-4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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